POSTED: 12/17/2025
타르코프에서 시작된 익스트랙션 루터의 번영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적은 맵으로도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고, 지루함을 덜어낼 수 있는 좋은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르가 이렇게까지 캐주얼한 변주로 대중성과 흥행을 동시에 움켜쥘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스케이프 프롬 덕코프>는 수많은 익스트랙션 루터들이 서로의 하드코어함을 과시하는 사이, 오히려 ‘캐주얼’을 전면에 내세우며 등장했다.
타르코프를 장기간 즐겨온 유저로서, 개인적으로는 난이도 ‘극한’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극한 난이도로 플레이하더라도 덕코프는 여전히 타르코프보다 훨씬 캐주얼하다. 문제는 그 캐주얼함이 초반에는 장점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플래시 게임을 연상시키는 UI,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스템, 긴장감보다 편의성이 먼저 드러나는 구조는 이 장르가 지닌 깊은 재미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가벼워 보였다. 첫 몇 시간은 솔직히 말해 실망의 연속이었다. 눈치 보지 않으며 타르코프를 대놓고 베낀 모습도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첫 지역인 '제로존'을 벗어나는 순간, 이 게임의 의도가 비로소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덕코프는 타르코프의 그림자를 벗어나려 애쓰는 게임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비껴간 게임이다. 복잡한 탄도 계산이나 과도한 패널티 대신,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선택의 흐름을 제공한다. 싸울 것인가, 빠질 것인가, 더 욕심낼 것인가, 아니면 지금 가진 것을 지킬 것인가. 이 장르의 핵심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낸 구조다.
중반 이후 덕코프의 전투는 단순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중독적이다. 총기의 손맛은 현실성을 포기한 대신 즉각적인 피드백을 택했고, 루팅의 쾌감은 짧고 반복적인 성취로 재구성됐다. 긴장감이 한 번에 폭발하는 타르코프와 달리, 덕코프는 긴장을 잘게 쪼개어 자주 보상한다. 이 차이가 장르 팬에게는 호불호의 기준이 되겠지만, 동시에 덕코프가 대중성을 획득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아쉬움은 분명하다. 익스트랙션 루터 특유의 절망감, 한 번의 판단 실수로 모든 것을 잃는 냉혹함은 크게 희석되어 있다. 물론 '극한' 난이도에선 타르코프와 비슷한 허탈함을 준다. 위험은 관리 가능하고, 실패는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게임에는 타르코프가 주던 무거운 긴장감은 없다. 총을 드는 순간 느껴지던 손의 떨림, 귀를 스치는 발소리에 심장이 먼저 반응하던 감각은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추가로 후반부 엔드 컨텐츠 요소는 반복적인 요소가 너무 많고 지루하다. 일정 수준 성장하면 긴장감이 사라지는 단계가 온다. PVE라 피할 수 없는 요소 같기도 하다. 100%를 달성했지만 억지로 하는 느낌이 강했다. 첫 엔딩은 텅텅 비어 있는 느낌이고, 진엔딩을 위해선 수 십 시간의 그라인딩을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덕코프는 장르를 배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장르가 왜 재미있는지를 다시 한번 정제해 보여준다.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얻는 재미, 불확실성 속에서 내려야 하는 결정, 그리고 무사히 탈출했을 때 찾아오는 안도감. 쌓이는 자원에서 오는 뿌듯함. 덕코프는 이 핵심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했다.
하드코어한 게임을 즐기기 어려운 유저에게 핵심만 추려 전달하는 요약본 같은 게임. 깊이를 줄인 대신 문턱을 낮췄고, 고통을 덜어낸 대신 반복을 허락했다. 이 장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고, 타르코프에 지친 플레이어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휴식처가 된다.
극한의 몰입을 원한다면 여전히 타르코프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트랙션 루터라는 장르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방향을 덕코프는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 캐주얼한 변주는 절대 얕지 않다. 다만,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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